책장의 계단 습작

그 무엇보다도 어두웠던 눈꺼풀 밖으로 언제부터인가 희미한 빛이 스며 들어왔다. 의식이 돌아오는 속도는 감각보다는 느렸다. 몸을 움직이거나 할 정신이 돌아오려면 아직 더 시간이 필요한 듯 했다. 소년은 무의식적으로 그 가느다란 빛을 구명줄로 삼아, 머릿 속에 남아 있는 기억들을 하나 하나 되짚기 시작했다. 마치 꿈과 같이 어둠 속을 헤메는 자신을 내려다 보면서. 하지만,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일시적인 기억상실과 같은 것이 아니었다. 소년은 어떠한 단어도, 자신을 표현할 수 있던 어떤 말도 입 밖으로 내뱉거나, 아니면 몸으로도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년은 경악하였으나, 무엇에 놀라야 하는지 조차도 티미했다. 마지막 남은 자의식의 발로로, 자신에게 남은 유일한 자기표현 방법으로서, 아무런 의미 없이 소리를 지르려던 그 때,

 소년은 눈을 떴다.

 끝간 데 없는 평원 위에는 거센 눈보라가 흩날리고 있다. 밤에는 별을 지우고 낮에는 해를 가리며 모든 것이 사라질 것처럼 자신의 색을 하얗게 바래 가는 그 한복판, 그 눈의 폭포 가운데에 홀로 빛을 내며 서 있는 유리의 탑. 소년은 그 바닥에 내팽개쳐져 있었다. 사지의 첨단은 자신의 것이 아닌 듯이 움직이지 않았고, 가장 먼저 이변을 감지한 눈꺼풀만이 밖에 부는 눈보라에 휘날리듯 수없이 깜빡였다. 고개를 돌릴 수도 없어 땅바닥으로 내리깔린 시선에는 유리바닥에 반사된 바깥의 하얗고 차가운 사막이 박혀 있었다. 눈보라는 가끔씩 점점이 유리벽에 맺혔고, 알게 모르게 탑 내부에 덮인 온기 때문인지 금세 모두 녹아 아래로 흘러내렸다. 소년은 잠시 그 광경을 바라보다 무의식적으로 손가락 끝에 힘을 주어 자신의 몸을 일으키려 했고, 곧 엄청난 고통에 다시 의식을 잃고 말았다.

 몸을 움직일 기력이 든 것은 하얀색으로라도 보이던 바깥세상에 완전한 검은 장막이 드리운 다음이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바닥으로 힘겹게 바닥을 짚고 일어나려 노력하기를 수 번, 미끄러운 유리벽은 야속하게도 소년의 팔을 계속해서 미끄러트렸다. 몇 번인가의 실패 끝에 깨달은 것은 한 번에 힘을 주어 몸을 일으켜야 된다는 것이었다. 그 본능적인 움직임은, 결국 소년은 자신의 자세를 바꾸는 데 성공했다. 비록 다시금 미끄러진 덕분에 결국 엎어졌던 몸을 바로눕는데 그치긴 했지만. 헐떡이는 숨을 몰아쉬며, 머리를 짚으려 눈 위로 올린 손바닥에서는 자잘하게 굳은 검붉은 핏자욱이 가루처럼 떨어졌다. 소년은 팔을 다시 바닥으로 내리려 했지만, 피로에 젖은 팔의 무게는 이미 그의 통제를 벗어난 뒤였다. 소년은 이마에 손을 짚은 채로 숨을 고르고선, 자신을 둘러싼 이 기묘한 건축물을 눈으로 훑어 보았다.

 끝을 알 수 없는 시험관같은 유리벽이 소년의 시야로는 가늠할 수 없는 어둠으로 수렴하고 있었다. 고개를 가뭇가뭇 돌려야만 간신히 외벽의 끝을 알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원통이었다. 그리고 그 기둥의 사이사이에는 아까부터 소년의 눈을 끊임없이 찌르던 빛을 내는 무언가가 여기 저기에 박혀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지금 눈을 뜨고 주변을 살펴 볼 수 있게 된 것도 저 광원들 덕분이었으리라. 그리고 그 중앙에서 주발과 같이 빛을 가리고 있는 것은 타래뭉치를 짜기워 올린 듯 한 두 갈래의 나선계단이었다. 그런데, 이 나선계단은 일반적이라고 생각되는 구조물이 아니었다. 건물 안에서 나선형으로 배치된 계단이라고 하면 외벽 혹은 그 내벽에 딱 붙어서 지어올라가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이 원목으로 된 나선계단은, 그 어떤 벽에 붙어 있는 흔적도 없었다. 그저 고개를 뒤로 젖힌 아가씨의 땋은 머리카락이 단정히 내리뻗혀 있듯, 거대한 유리 원통 중앙에 오롯이 서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흐린 눈에 제대로 확인되지 않는 그 중앙에는, 형형색색의 무언가가 마치 거대한 기둥과 같은 것이 있었다.

 시간이 제법 흘러, 어느 정도 기력을 찾은 소년은 힘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서 본 나선계단의 정체에, 소년은 다시 한 번 다리에 힘이 풀려 버렸다. 그 자체로 올라 있는 나선계단의 중간에는,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높은 기둥이 솟아 있었고, 그 기둥 외벽은 책으로 가득 차 있었다. 형형색색의 책들을 담기 위함인 듯, 책장의 모습 역시 제각각이었고, 끝없는 눈보라의 반복, 무한히 뻗어 올라가는 나선계단의 대칭 속에서 이 제멋대로 난 책장의 기둥 홀로 유일하게 비정형적이었다. 

 소년은 무엇엔가에 홀린 듯이 책장으로 다가갔다. 기둥을 타고 오르는 나선계단을 오르며,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그 곳에는 어떤 나라의 역사를 써 놓은 책이 있었고, 악기의 연주법을 설명해 놓은 책도 있었다. 아무런 개연성이 없는 단어들을 나열해 놓은 듯한 시집이 있었고,  수많은 괴물을 묘사한 소설이 있었다. 소년은 계속해서 계단을 오르며 그저 책을 읽고, 또 읽었으며, 읽을 것이 없어지면 계단 아래로 책을 던지고 옆의 기둥에서 다른 책을 꺼낼 뿐이었다. 마치 이 탑은 그것을 위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 처럼, 소년의 행동은 무의식적이었지만, 절도가 있었다.

 갑자기 거대한 진동이 탑을 휘감았다. 마치 물 속으로 가라앉듯이, 탑의 바닥이 하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소년이 책을 읽으며 계단을 오를 때 마다, 거센 눈보라에도 끄덕하지 않던 계단과 유리벽은 마치 파도를 맞은 모래성처럼 바스라졌다. 유리벽 밖의 무한한 눈폭풍이 소년을 집어 삼킬듯이 회오리치며 그 모든 것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소년은 방금 전에 피투성이었던 그 사실도, 몸을 움직일 힘이 없었던 것도 잊은 것처럼, 눈 앞의 활자가 새겨진 종이뭉치에만 관심을 가질 뿐이었다. 

 이루 셀 수 없는 시간이 지나고, 결국 소년은 나선계단과 기둥의 끝에 도달하였다. 이미 유리벽은 아주 예전에 그 높이를 다하였고, 지금 남은 것은 오로지 부서져가는 나선계단과, 책의 기둥 뿐이었다. 자신이 읽은 책의 수 만큼이나 많은 별들이 소년의 눈 앞을 뒤덮고 있었다. 이미 눈폭풍이 닿을 수도 없는 높이에 올라온 소년은 마치 구름을 밟은 듯 마지막 계단을 올랐다. 똬리를 틀고 올라온 쌍나선계단과, 기둥의 꼭대기는 서로 이어져 있었고, 그곳에는 적당한 두께의 책이 하나 놓여 있었다. 소년은 그제서야 아래를 내려 보았다. 그 곳에는 계속해서 부서져가는 탑의 잔해가 바람을 타고 구름 안으로 빨려들어가고 있었고, 이제 몇 남지 않은 계단은 힘겹게 소년과 마지막 책을 받치고 있었다. 

 소년은 약간 씁쓸한 듯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서는 마지막 자리에 놓여 있는 책을 손에 쥐고, 눈을 감고 허공으로 한 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 한 걸음, 또 한 걸음. 아무것도 없는 하늘 위에 소년은 자신의 계단을 만들어 별을 향해 걸어갔다. 마지막 그들을 담은 나무로 된 계단은 힘없이 바스라지고, 소년은 다시 눈을 떠 자신이 가야 할 별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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