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화상(自畫像) - 5 습작

"그 얘기는 도대체 몇 번을 듣는거유, 형님. 아니, 듣기 좋은 육자배기도 한 두번이라야지. 자, 그 얘기는 그만 좀 하고, 뭐 좀 재미있는 얘기좀 해 봅시다."

 A는 지겨운 표정으로 P의 말을 끊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P가 한 번 술에 취해 자신의 과거사를 늘어놓기 시작하면 없어지는 것은 시간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길거리 예술인의  주머니는 언제나 빈곤하다. 물론 술이 한 두잔 더 들어가면 생각이 또 바뀔 수는 있겠다. 하지만 한 푼이 아쉬운 지금, 아낄 수 있을 때 아끼자는 것이 A의 생각이었다. A는 무언가 더 이야기하려는 P의 말을 술잔을 들어 끊고, 빈 잔에 소주를 따라 주었다. 일단 지금은 입을 막아 두기 위해서.

 종로 구석 어느 허름한 선술집. P와 A는 거의 대가리만 남은 노가리 두 마리에 빈 소주병들을 사이에 두고 앉아 있다. P의 주량은 생각보다 많지 않기에, 언제나 한 병째에서 이야기 보따리가 터져 버리게 된다. 취하게 되면 말이 많아지는 것이 P의 주사였다. P는 가누지 못하는 고개를 바로 잡으려 애쓰며 A를 똑바로 쳐다 보았다. 아니, 쳐다 보려 하였다.

 "야, 임마. 형이 이야기하면 그냥 들어야지 그걸 재미가 없다고 끊으면 쓰냐 임마. 형이 얼마나 또 마음이 아프면 너한테 이런 이야기까지 하겠냐, 어?!"

 "형님, 내가 그맘 알지요. 아는데, 나는 정말 지겨워요. 솔직히, 뭐 어렸을 때 천재란 소리 안 들어보고 산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도 옛날에 고등학교에서 락밴드 할 때, 머리 길 때는 여자애들이 줄을 섰다고 얘기 했죠? 네? 나도 내가 이렇게 될 줄 몰랐다니까, 형님."

 A는 거리의 악사였다. 흘러간 옛날 노래를 통기타를 치며 부르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바닥에 놓아 둔 기타케이스에는 동전과 지폐가 들어올 때도, 안 들어올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일을 좋아했다. 노래하는 것이 좋았고, 정해진 것은 싫었기 때문이다. A가 P와 연을 갖게 된 것도 그의 반골적인 기질 때문이었다. 그 때, A가 자리를 옮기기 위해서 지나가던 중, 그는 한 손님에게 타박을 듣던 P의 그림을 보았다. 손님과 그림은 전혀 닮지 않았고, 그녀는 화를 내며, 돈을 내지 않고 구경하던 A의 곁을 지나갔다. 그 때, A는 자신도 모르게 P에게 말을 걸었다. 도대체 어떤 모습을 보고 이런 그림을 그리는 건지에 대한 궁금증에. 결국 술자리까지 이어지게 된 이 만남으로, A는 P와의 인연을 갖게 된다. 결국 그 때부터 지금까지 그의 그림관에 대해서 제대로 된 대답을 듣지는 못했지만, 명동 바닥에서 서로간에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하나 있다는 것만으로도 A는 만족하기로 했다.

 오늘은 A의 벌이가 좀 더 짭짤한 편이었기에, 그가 술을 사기로 했다. 아니, 언제나 A가 P보다는 벌이가 좋았다. 앞서의 이야기에서 어느 정도 눈치채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P의 그림은 돈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갖고 있는 예술혼 안에서 앞에 있는 사람들을 표현하는 것은, 개인 공방에서나 통할 작업이었다. 이 거리에 오는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모습을 예쁘게 그려주는 것을 원했다. 하지만 P는 언제나 자신의 색채를 추구했다.

 "형님이 매일같이 했던 얘기 또 하니까, 나도 물어봤던 얘기 또 한번 좀 물어봅시다. 도대체 왜 형님은 사람들을 그렇게 그리시는 거요? 아니, 왜 여자애를 그리는데 히틀러 비슷한 몰골이 나오고, 오히려 남자애를 그리랬더니 발레를 하는 모양이 나오고. 처음에는 억하심정인가 했어요. 그런데, 오는 사람마다 다 다르게 그렇게 표현을 하니, 누가 좋아하겠느냐는 말이지."

 A는 이제는 별로 궁금하지도 않다는 듯이 말을 끝내고, 창밖을 내다보며 얼마 남지 않은 노가리의 대가리를 씹었다. 대가리에는 거의 뼈가 대부분이었고, 제대로 굽지 않아 질기기 그지 없었다. A는 계속해서 되새김질 비슷한 것을 해야 했다.
 P는 고개를 숙인 채로 웅얼거렸다.
 
"사회 때문이야."
"네?"
"사회 때문이라고. 얼마나 지금 나라 돌아가는 꼴이 안 좋냐. 여기 길거리 돌아다니는 사람들 보면 다 안쓰러워 보이고 그래 임마. 너만 해도 그래. 너도 그 실력이면 어디 나가서 공연을 해도 이거보다는 잘 벌고 다닐텐데 결국 명동바닥에 앉아있는 거 아니냐. 난 보인다. 사람을 보면 주변에 막 안 좋은 기운들이 떠돌고 막 그래. 나는 그런걸 표현하고 싶은거라고. 다른 사람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런거."

 장광설을 늘어 놓는 P의 자세는 고개 숙인 채 그대로였다. A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어느새 비어버린 소주잔을 채우며 말했다.

 "그거, 저번에 말하신 거하고는 다른데요 형님. 저번에는 사람의 웃는 얼굴 안에 가식이 어쩌구 그랬잖소."
 "그게 그거야 임마."

 그 말을 끝으로, P는 술상에 머리를 박고 코를 골기 시작했다. A는 한숨을 쉬며 남은 노가리를 한 입에 털어 넣었다. 언제나 그와의 술자리는 이렇게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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