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유람기 이야기를 싣고 온 발걸음



 종착지는 모두에게 평등하다. 몇 발자욱을 걸어 가든지, 어떤 길을 택하든지 언제나 마지막 그 곳에 있는 것이 종착지이다. 누군가는 자의로, 또 누군가는 타의로 종착지를 선택하고, 그렇게 그 끝을 향해 모두가 떠나게 된다. 여행의 경우라면 더욱 그러하다. 그 누구도 목적지를 제대로 정하지 않는 경우는 없다. 정처없는 발길이라고 자조적으로 말하더라도, 결국 발길 닿고 싶은 곳 그곳으로 방향을 설정하게 된다. 결론은 이미 정해졌지만, 마치 보류되었다고 믿은 채로.

 남쪽으로 떠난다. 

  종점임을 알리는 방송이 끝나고, 천안행 급행열차에서는 몇 되지 않는 사람들이 바삐 걸음을 옮긴다. 정류장 한 가운데 있는 의자에 앉아 바삐 스마트폰을 만진다. 남쪽으로 가는 기차 중에서 가장 빠른 표를 검색한다. 호남권으로 가는 무궁화호가 열두시 반에 출발한다고 적혀 있었다. 이 정도면 점심을 해결한 다음에 바로 탑승하면 될 것 같았다. 이 표를 구입하기로 결정하고, 어느 도시로 갈지를 결정해 본다.  
 




 눈 앞에 있던 기차가 어느 샌가 사라지고, 천안역 앞의 풍경이 빗발에 가린 채 어슴푸레 눈에 들어온다. 역을 그대로 지나쳐 가는 KTX의 모습이 보인다. 그 열차를 보자, 얼마 전에 TV에서  보았던 영화에서 기차와 함께 남원이 언급되었던 것이 기억이 났다. 그래, 남원이다. 이번 짧은 여행의 목적지는 그렇게 남원으로 결정되었다.





 목적을 도시로 잡았기에, 그 도시가 어떤 곳인지를 보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되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섬진강변에서 맥주나 한 잔 하면서 흘러가는 구름을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무엇을 하겠다' 라는 목적이 아닌, '한 도시'를 즐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어떤 것인지를 기차를 기다리면서, 끊임없이 궁리했다.




기차는 정시에 도착하였고, 별다른 이변 없이 정해진 좌석에 탑승하였다. 남쪽으로 달릴 수록 맑아지는 구름의 밝기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수도권에 있는 친구들은 모두 폭우에 집 안에 있다고 하였는데, 나름 제대로 된 선택인 것 같아 괜히 기뻤다. 천안에서 남원까지는 2시간 40분이 걸린다고 표에 적혀 있었다. 언제나 무궁화호는 느리게 가기에 그 매력이 있다. 미리 준비해 둔 책을 읽으며, 전라도의 경치를 천천히 즐겼다.
 아, 약간 씁쓸한 점이 하나 있었다. 기차를 타고 한시간여가 지났는데도, 홍익회 카트가 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인가를 검색해 보니, 경영적자를 이유로 코레일에서 거의 모든 홍익회 인원을 감축하고 4번차량에 열차카페를 운영하고 있다는 뉴스가 보였다. 바로 지갑만을 챙겨서 가 본 4번칸에는 매점따위는 없고, 고장난 자판기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예전에 기차를 타며 마시던 음료수와 간식거리의 추억은 이제 지나간 일이 되어 버렸다.



 남원역의 하늘은 구멍이 뚫린 듯 청명했다. 산 너머 먹구름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다만 이 곳만이 맑았다. 역 앞의 무인관광안내센터에서 지도를 하나 집어 들고 거리를 재어 보았다. 일단 도시 자체가 섬진강을 끼고 있어서 시내까지만 들어가면 강을 구경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거리를 손대중으로 대충 재어 보아도, 직경이 5km 남짓한 작은 도시라는 것이 한 눈에 들어왔다. 보통 이럴 때는 걸어서 다녀 보는 것이 가장 그 도시를 파악하는 데 적합하다고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 숙소를 잡을 때 까지는 대중교통을 이용해 보기로 하였다. 바로 앞에 온 버스를 타고, 다음 날 돌아갈 시외버스터미널쪽으로 가는지 방향을 물어 보았다.




 시내버스를 타고 이동하던 도중, 시외버스터미널이 아닌 공용버스터미널이 보여, 그 곳에서 하차하고 그 근방에서 숙소를 잡기로 하였다. 이유는, 이 곳에서 섬진강변이 더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근방 허름한 모텔에 방을 잡고, 짐을 푼 다음 바로 옆에 있는 다리 아래로 내려왔다. 구름은 마치 서울 지하철 인파마냥 너무나도 분주하게 강 위를 떠다녔다. 섬진강은 파도도 없이 고요하게 그 모습을 강물 위에 비추고 있었고, 아무도 없는 강변도로의 모습은 산책을 즐기기에 더 없이 조용했다. 




 정처 없이 걷다 보니 강의 왼쪽은 춘향테마파크라는 곳이, 그리고 오른쪽에는 남원의 관광명소인 광한루가 있다는 표지판이 보인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목적지를 설정했더니 우리나라의 역사적인 소설의 발원지라는 것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테마파크라는 곳을 굳이 혼자서 들어갈 필요는 없어 보였고, 광한루를 들러 보기로 하였다.


 남원에서 내세우는 관광지답게, 아무도 없던 거리와는 대조적으로 이 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외국인관광객도 보였고, 이 곳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사람들의 무리는 삼삼오오 보고 싶은 것들을 찾아 분주히 돌아다녔다. 춘향이가 탔던 그네를 체험하는 곳, 지금까지의 춘향전의 역사를 설명해 놓은 박물관, 그리고 그저 앉아서 쉴 수 있는 정자까지. 나름 잘 꾸며 놓은 휴식공간 같은 곳이었다. 



 돌아가는 길 역시 도보로, 하지만 시내를 관통하여 돌아가기로 하였다. 이 도시의 모습을 오늘 하루에 제대로 눈에 구겨 넣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근근이 다시 소나기가 내리기는 했지만, 그렇기에 오늘 외에는 더욱 시간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시내버스를 타고 올 때 부터 어렴풋이 느껴진 사실이지만, 이 곳에 고층건물은 거의 없었다. 이삼층 남짓한 상가들 중 거의 대부분이, 고층 위에는 이미 장사를 접은 듯 임대 라는 종이를 붙이고 있거나 불이 꺼져 있었다. 길거리에 듬성듬성 사람이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건물들 안에도 사람들은 없었다. 그저 지나 다니는 차 몇 대만이 이곳에 사는 사람들을 증명하고 있었을 뿐.




 잠시 먹을 것을 사러 나왔던 밤거리엔 더더욱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차도를 활보하고 다녀도 될 정도로, 이제는 자가용조차 거리에 없었다. 돌아가면서 다시 내려다본 섬진강은, 여전히 하늘을 비쳐 검은 먹물을 품은 듯 새까맣게 꿈틀거렸다.
 일요일이었고, 비가 오지 않을 듯 근근히 쏟아지던 주말이었다. 사람이 없을 요건은 충분하였고, 내가 다닌 거리가 사람이 없는 동네였는지도 모른다. 발로 다니지 않고 눈으로만 본 거리를 전부 다 더한다 하더라도 남원 전체의 절반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좋았다. 바쁘지 않게, 사람에 치이지 않고 하루를 보내고자 하는 당초의 목적을 아주 충실하게 이행했기에. 지금까지 대도시에서 치이며 살아왔던 일상에서, 너무나도 고즈넉한 시골의 모습에 시쳇말로 '충전'이 되었다고나 할까. '단 하루'이기에 즐겁게 이 경치를 감상하였던 것 같다. 남원은, 그렇게 휴식을 주었다.




 다음 날, 떠나기 전 터미널 앞에 있는 백반집에서 추어탕을 시켰다. 추어탕은 옛날의 질박한 맛 그대로였다. 맛이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간은 세지만, 오히려 요새 서울에서 자주 먹었던 사람이라면 조금 심심하게 느껴질 정도로 맛의 굴곡이 없었다. 다만, 칠천원짜리 추어탕 한 그릇을 시켰는데도, 투박한 쟁반 위에 반찬이 거의 열개 가까이 깔리는 모습에서 다시 시골의 푸근한 인심이 느껴 진다. 한 그릇의 따듯한 마음을 먹었다 생각하며, 부른 배를 두드리며 다시 서울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잠시간의 외도에서, 다시 일상을 향해.






- Epiloge -

 여행을 시작하기 전, 천안에서 친한 형님을 만났다. 그 형님은 나에게 현실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마누라가 생기고, 아이가 학교에 가게 되었다. 한 가정의 가장이 된 그에게 돈을 벌어야 하는 이유는 가족이라는 단어로 일원화 되었다. 잠깐의 외출과 타인과의 만남은, 그에게는 거대한 일탈이 되어 버렸다. 단순한 술자리 하나에도 그는 심장을 조였던 너트가 풀린 듯 크게 기꺼워 하였고,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 당연한 일이라며 쓰게 웃었다. 그리고서는 모든 것을 잊고 싶어하듯 술을 끊임없이 부어 넣었다. 갈릴레오였나,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하였다. 지구는 열심히 자신의 일을 계속하고 있었고, 날이 밝아 다시 현실로 돌아가야 할 시간은 언젠가 올 것이다. 아마도 그 사실마저 잊기 위해서 형님은 그렇게 술잔을 기울였나 보다. 

 정신이 든 것은 아무도 없는 숙소 안이었다. 내가 곯아 떨어져 자는 사이에, 형님은 먼저 현실이라는 전쟁터로 돌아갔다. 전화로 다시 한 번 형님의 안전한 귀가를 확인하였다. 인사도 드리지 못하여 죄송하다고. 그는 괜찮다고, 조심히 들어가라는 작별의 인사를 남겼다. 숙취로 깨질듯한 머리를 추스리고서는 내가 오늘 해야 할 일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나 역시, 형님을 만나기 위해, 그리고 잠깐의 일탈을 위해 이 때를 재어 두었던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한 계획을 실행하기 위한, 이틀의 시간을. 

 무위의 시간을 보낼 곳은 이미 정해 놓았었다. 천안에서 가까운 충주호로 가서, 호수가에 자리를 펴고 앉아 글을 쓰고, 책을 읽고, 구름을 보는 것. 이것만이 유일한 계획이었다.

 하지만 내가 어째서 눈을 떴는지를 기억하자, 나는 아무것도 없어야 할 계획을 다시 수정할 수 밖에 없었다. 창문을 계속해서 두들기는 빗소리는 자명종과도 같았다.

 잠시 사고가 정지하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출발하긴 하였지만, 갇힌 방 안에서의 자유를 꿈꾼 것은 아니었다. 불현듯, TV를 틀었다. 급하게 버튼을 눌러 뉴스 채널들을 찾았다. 그 중 하나가, 다행히도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방송이 끝나고 오늘의 날씨가 나왔다. 일기예보는 마치 계시와도 같았고, 나는 무엇엔가 홀린 듯 그 화면을 쭉 쳐다보았다. 끝날 때 까지.



-H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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